You’re viewing a text-only version of this website that uses less data. View the main version of the website including all images and videos.
'나는 북에서 온 아미입니다'…BTS 컴백이 더 특별한 사람들
- 기자, 김효정
- 기자, BBC 코리아
- 읽는 시간: 6 분
"누가 지시하고 시켜서 하던 체제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나'로 살 수 있게 해준 존재예요. 북한에서 온 제게 방탄소년단(BTS)은 삶의 활력, 그 이상입니다."
8년차 BTS 팬 탈북민 이연수(가명) 씨의 말이다.
21일 서울 광화문 광장은 이른 아침부터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멤버 전원이 군 복무를 마치고 4년 8개월 만에 돌아온 'BTS 컴백 라이브: 아리랑' 공연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국내외 팬이 모였다.
치열한 티켓팅을 뚫고 현장에 온 이 씨 역시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보라색 옷을 입고 아미밤을 든 그에게 이 무대는 단순한 공연이 아니다. BTS는 그의 정체성과 자존감을 되찾게 한 존재다.
북한이 고향인 '탈북 아미들'에게 이날 공연은 콘서트를 넘어선 의미를 갖는다. 함께 숨 쉬고 환호하며, 이 사회와 연결돼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씨가 처음부터 케이팝 같은 대중문화에 열광했던 것은 아니다. 가난을 견디다 못해 두만강을 건넜던 그에게 탈북은 정치적 결단이라기보다 처절한 '생존'의 문제였다.
하지만 탈북 이후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중국에서 붙잡혀 북송됐고, 무단 이탈 혐의로 1년가량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을 버티게 해준 것은 중국 조선족을 통해 우연히 접한 한국의 유행가들이었다.
"다행히 한국행 시도가 발각되지는 않아 1년 정도 수감 생활을 했어요. 그때 저를 버티게 한 건 '일어나', '힘을 내' 같은 가사가 담긴 한국 노래들이었어요. 그 노래들이 제겐 유일한 위안이었죠."
이방인의 꼬리를 떼게 해 준 '덕질'
우여곡절 끝에 다시 탈북에 성공했지만 자신감 없이 살아가던 2018년, 그는 우연히 BTS의 '아이돌(IDOL)' 시상식 공연 영상을 접하게 됐다. 한국적 요소를 결합한 무대와 폭발적인 에너지가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엄청난 에너지에 정신이 나가버렸어요. 그 이후로는 잠도 안 자고 미친 사람처럼 검색을 했었죠."
그에게 '방탄소년단'이라는 이름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글인 데다가, 북한에서 '소년단'은 익숙한 단어거든요. 중학생이 되면 의무적으로 소속되는 단체가 소년단이라서… '아니, 여기 남한에도 소년단이 있어?' 했죠."
이후 그의 일상은 달라졌다. 그는 '아미 서울 단체채팅방'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고, 팔로워 3000명이 넘는 X 계정도 운영한다. 공연과 팬미팅, 투표 정보를 공유하고 생각을 나누는 것이 일상이 됐다.
가장 큰 변화는 사람들과 가까워지며 스스로 출신을 밝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사실이었다.
"제가 친한 아미들에게는 북한에서 왔다고 알려요. 그런데 팬들은 그걸 전혀 이상하게 보지 않았어요. 브라질에서 온 아미, 일본에서 온 아미처럼 그냥 저는 '북한에서 온 아미'였던 거예요.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었죠."
감정의 자유를 깨닫다
작가이자 유튜버로 활동하는 40대 탈북민 강하나 씨도 BTS의 노래를 통해 처음으로 '감정의 자유'를 깨달았다고 BBC에 말했다.
"북한에서는 노래에 개인의 감정을 담을 수가 없어요. 모든 예술은 체제를 찬양하거나 집단의 의지를 담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들으면서 '이게 진짜 자유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마음대로 감정을 노래에 담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죠."
강 씨는 특히 '봄날'을 좋아한다고 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으로서 그 그리움이 담긴 가사가 제게는 깊이 와닿았어요. 보고 싶으면서도 점점 더 낯설어지는, 이제는 다른 세상처럼 느껴지는 그 복잡한 감정이 한 곡에 담겨 있더라고요."
그는 북한에서는 누군가를 열렬히 응원하는 일이 정해진 틀 안에서만 가능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자신의 꿈과 목표를 향해 그렇게 열정을 다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BTS처럼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도 배우게 됐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강 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다양한 남북 문화 관련한 이야기를 올리고 있다. 그 중에는 BTS와 케이팝을 주제로 한 것도 많다.
그는 한 영상에서 "문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통할 때마다 울컥한다"며 "무지함에서 벗어났다는 걸 확인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북한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설며했다.
강 씨가 노래를 통해 '자유'를 만났다면, 이연수 씨는 BTS의 음악을 통해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특히 'Love Myself'의 가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왜 자꾸만 감추려고 해 니 가면 속으로 / 내 실수로 생긴 흉터까지 다 내 별자린데"
이 씨는 이 구절을 읊조리며 "북한에서는 개인의 감정이나 내면을 노래로 드러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만큼, 이 메시지가 더 크게 다가왔다"고 말했다.
"상처투성이였던 어제의 나에게서 늘 도망치려 했어요. 그런데 이 노래를 듣고 그 모습까지 온전히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죠. 나를 담아낼 수 있는 넓은 그릇이 생긴 기분이었어요."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자 세상도 달라 보였다. 이 씨는 "나를 이해하게 되면서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도 더 이상 날 서지 않게 됐다"며 "이제야 다른 사람을 마음 편히 품을 수 있는 공간이 생긴 것 같다"고 덧붙였다.
'방탄 배낭 매봤니'...북한에 퍼진 은어
이 두 사람은 시기상 북한에서 BTS를 접한 경우는 아니다.
하지만 최근 탈북민 커뮤니티 등을 통해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북한 내부에서도 BTS는 암암리에 꽤 알려진 존재다. K-콘텐츠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이들이 북한에 머물던 시기보다 한국 문화 콘텐츠는 내부에서 더 널리 확산된 것으로 풀이된다.
강하나 씨는 "북한에서는 '방탄조끼 입어봤니?', '방탄 배낭 매봤니?'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현상은 수치로도 확인된다. 2023년 말 국민통일방송과 데일리NK 조사에 따르면 탈북민 응답자의 98%가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콘텐츠는 행동 변화로도 이어졌다. 응답자의 80%는 한국 사회에 대한 호기심이 커졌다고 답했고, 말투와 패션 등 일상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확산과 함께 통제도 강화되고 있다. 2022년 북한 량강도 혜산에서는 한국 콘텐츠 유포 혐의로 10대 3명이 공개 처형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씨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너무 안타깝다고 했다" 과거 북송 당시 감옥에서 만났던 이들의 기억도 선명하다.
"제가 감옥에서 만난 수감자들이 무슨 죄냐면요,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 한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했다는 이유였어요."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시간'
광화문 공연을 앞두고 이 씨는 "이제 시작되는구나 싶어 마음이 타오르기도 하지만 걱정도 앞선다"고 말했다. 광화문이라는 상징적 공간에서의 공연인 만큼, 작은 실수라도 대중의 비난의 화살이 될까 염려되는 팬의 마음이다.
"잘해야 한다는 마음도 있지만, 응원은 곧 믿음이라고 생각해요. 그저 방탄만 믿고 가자는 마음입니다."
수많은 아이돌 중 왜 하필 BTS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
"포기하지 않고 버텨온 시간들이요."
이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작고 이름 없는 곳에서 시작해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가는 모습이, 이곳에서 자리 잡으려 애쓰던 저를 떠올리게 했어요. 그래서 더 응원하게 돼요. 방탄소년단과 아미인 저는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