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라니아 트럼프의 연설, '엡스타인 논란' 다시 불붙여

동영상 설명, 멜라니아 트럼프 "엡스타인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다"
    • 기자, 나다 타우픽
    • 기자, 뉴욕 특파원, BBC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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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아 트럼프가 불과 일주일여 전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문제로 대국민 연설을 했던 백악관 연단에 지난 9일(현지시간) 올라섰다. 이번 등장이 충격적인 순간이 될 것이라는 징후는 전혀 없었다.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이것이 반드시 봐야 할 장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당국자들에 따르면 행정부 내부 핵심 인사들조차 연설 주제에 대해 사전에 어떤 정보도 받지 못했다.

성조기를 양옆에 두고 선 그의 첫 문장은 현장을 단번에 흔들었다.

"나를 불명예스러운 제프리 엡스타인과 연결 짓는 거짓말은 오늘로 끝나야 합니다."

이 한마디로 대통령을 괴롭혀온 엡스타인 논란은 그의 아내를 통해 다시 한 번 전면에 떠올랐다.

미국 케이블 방송들은 상황의 중대성을 고려해 즉각 이란 관련 보도를 중단하고 이 장면으로 전환했다.

영부인은 그동안 공개 행보를 신중히 선택하며 눈에 띄지 않는 행보를 이어왔다. 남편과 달리 극적인 연출이나 언론을 놀라게 하려는 성향도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는 준비된 원고를 읽으며 엡스타인이나 맥스웰과 어떤 관계도 맺지 않았고, 엡스타인을 통해 남편을 소개받은 적도 없으며, 그의 범죄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어 엡스타인 피해자들이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의회 청문회를 공개적으로 열 것을 촉구하며 발언을 마쳤다.

만약 그가 질의응답에 응했다면, 가장 먼저 나왔을 질문은 왜 지금 이 시점에서, 그것도 갑작스럽게, 유죄 판결을 받은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과의 연관성을 부인하며 처음으로 공개 입장을 밝혔느냐였을 것이다.

그가 언급한 일반적인 주장들은 이미 수년간 떠돌아온 것들로 그동안은 주로 변호인을 통해 대응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발언이 새로운 상황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려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제기됐다.

멜라니아 트럼프가 정장 스커트 차림으로 백악관 대통령 문장이 새겨진 연단으로 걸어간다.

사진 출처, Reuters

엡스타인을 수십 년간 취재해온 탐사보도 기자 비키 워드는 이번 기자회견의 시점이 혼란스럽다고 말했다.

"멜라니아 트럼프가 1년 전, 엡스타인 논란이 처음 불거졌을 때 이런 발언을 하며 의회에 피해자들의 증언을 요청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반응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발언의 맥락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엡스타인 관련 자료에서 멜라니아 트럼프의 존재는 거의 없다. 길레인 맥스웰에게 보낸 한 통의 우호적인 이메일 정도뿐이다. 이해하기 어렵다. 그가 피해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여기에 더해 트럼프 대통령은 멜라니아 트럼프가 해당 발언을 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는 앞서 영부인 측 대변인이 대통령이 이를 알고 있었다고 밝힌 것과 엇갈린다.

멜라니아 트럼프의 발표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으로 이어졌다.

여러 피해자들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번 상황에 대한 당혹감을 공유했고,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13명과 버지니아 로버츠 지우프레의 가족은 공동 성명을 내고, 피해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책임 회피일 뿐 정의가 아니라고 밝혔다.

"영부인 멜라니아 트럼프는 현재 권력을 가진 이들을 보호하는 정치적 환경 속에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법무부와 수사기관, 검사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여전히 엡스타인 파일 투명성 법을 완전히 이행하지 않고 있다."

민주당은 법무부가 정당한 이유 없이 지나치게 많은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체 600만 건의 문서 가운데 법무부는 350만 건을 공개했으며, 나머지는 법적 제한으로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2019년 연방 기소장에 따르면 14세였을 때 엡스타인에게 학대를 당한 마리나 라세르다는 이 성명에 서명한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이후 소셜미디어에 올린 별도의 영상에서 영부인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했다.

멜라니아가 ‘G’에게 보낸 이메일: "친애하는 G! 잘 지내고 있나요? 뉴욕 매거진에 실린 JE 관련 기사 잘 봤어요. 사진 속 모습도 아주 멋지네요. 전 세계를 바쁘게 다니고 있는 걸로 아는데, 팜비치는 어땠나요? 저도 빨리 그곳에 가고 싶어요. 뉴욕에 돌아오면 전화 주세요. 즐거운 시간 보내요! 사랑을 담아, 멜라니아"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출처, US Department of Justice

사진 설명, 멜라니아 트럼프가 길레인 맥스웰에게 보낸 이메일

마리나 라세르다는 "지금 상황은 단지 다른 이슈로 시선을 돌리려는 것처럼 들린다"며 "그렇다면 이것이 트럼프 가족에게 어떤 이익이 되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반면 생존자 리사 필립스는 법무부가 엡스타인 파일 논란을 마무리하려 한다는 기존 입장에 맞선 멜라니아 트럼프의 발언을 높이 평가했다.

필립스는 BBC 라디오 4 '투데이' 프로그램에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요구한 것은 "대담한 행동"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말에 그치지 말고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나라면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조금 더 밀어붙일 것이다. 이제 그렇게 말했으니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상황을 어떻게 진전시킬 수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엡스타인 파일을 조사 중인 하원 감독위원회 위원장은 10일(현지시간)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사 종료 이후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청문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공화당 소속 제임스 코머 위원장은 "영부인의 발언에 동의하며 감사한다"며 "청문회를 열 것"이라고 말했다.

'더 스파이더: 제프리 엡스타인과 길레인 맥스웰의 얽힌 관계'의 저자 배리 레빈은 멜라니아 트럼프가 피해자들을 언급하고 인정한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편의 입장과는 다른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피해자들에게 냉담한 태도를 보여왔다고 말했다.

"대통령은 피해자들의 책임 규명을 지지하는 발언을 할 기회를 여러 차례 가졌지만, 엡스타인 파일은 정치적 조작에 불과하다는 입장을 반복해왔다."

레빈은 또 멜라니아 트럼프가 독립적인 판단을 하는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대통령 역시 과거 이를 인정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멜라니아와 미셸: 새로운 시대의 퍼스트레이디'의 저자 태미 비질은 BBC에 이번 성명에 남편이 언급되지 않은 점은 백악관 내부에서 대통령과 영부인 간 입장 차이가 드러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바와 달리 대통령이 추진하려 하지 않는 의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는 자신의 의제를 강화하려는 것으로, 매우 독립적인 발언이다. 이전에도 몇 차례 이런 모습을 보였다."

민주당은 이를 정치적 기회로 보고 있다.

멜라니아 트럼프는 이번 발언으로 엡스타인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으며, 수사를 종결하려는 행정부와는 다른 입장을 취하게 됐다.

하원 감독위원회 최고위 민주당 인사인 로버트 가르시아 의원은 이번 연설에 놀랐다며, 트럼프 행정부가 이제 영부인의 발언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멜라니아 트럼프가 진정한 정의를 원한다면 남편에게 엡스타인 파일의 나머지 내용을 공개하고 팸 본디가 증언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1990년대 엡스타인과 교류했고 관련 문서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지만 그의 범죄를 알지 못했다고 부인해온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엡스타인 파일 논란을 정치적 조작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논란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 인물의 의도를 악의적이라고 비난하기는 어렵다.

엡스타인 논란은 여전히 행정부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문제이며, 멜라니아 트럼프의 이번 발표로 다시 힘을 얻고 있다.